이효석 작가 연보 1920년
1920년 |
1920년(13세) |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 입학. |
1925년(18세)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제21회).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학교) 예과 입학. 예과 조선인 학생회 기관지인 《문우文友》 간행에 참가. 《매일신보每日申報》 신춘문예에 시 「봄」 입선. 유진오兪鎭午, 이희승李熙昇, 이재학李在鶴 등과 사귀며《문우》와 예과 학생지인 《청량淸凉》에 콩트 「여인旅人」발표. |
1927년(20세) |
예과 수료 후 경성제대京城帝大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 편입. 시 「님이여 들로」, 「빨간 꽃」, 「6월의 아침」, 단편 「주리면…-어떤 생활의 단편-」, 제럴드 워코니시(Gerald Warre-Cornish)의 「밀항자」 번역판을 《현대평론》에 발표. |
1928년(21세) |
경성제대 재학 중 단편 「도시都市와 유령幽靈」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 유진오와 함께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불리게 되었으나 KAPF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음. |
1929년(22세) |
단편 「기우奇遇」를 《조선지광朝鮮之光》에, 「행진곡行進曲」을 《조선문예朝鮮文藝》에 발표,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중외일보中外日報》에 발표. |
이효석 작가 연보 1930년
1930년 |
1930년(23세) |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졸업논문은 「The Plays of John Millington Synge, 1871~1909」. 단편 「마작철학麻雀哲學」, 「깨뜨러지는 홍등紅燈」, 「북국사신北國私信」, 「상륙上陸」, 「추억追憶」 발표. 안석영安夕影, 서광제徐光齊, 김유영金幽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여(5월 26일) 연작連作시나리오 「화륜」을 바탕으로 침체의 늪에 빠진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줌. |
1931년(24세) |
시나리오 「출범시대出帆時代」를 《동아일보東亞日報》에 발표. 단편 「노령근해露領近海」를 《대중공론大衆公論》 6월호에 발표하고, 같은 달 최초 창작집 『노령근해』를 동지사同志社에서 발간. 이 단편집에서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문인적 성향을 보임.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신의 미술작가 지망생 이경원李敬媛과 결혼. |
1932년(25세) |
장녀 나미奈美 출생. 부인의 고향인 함북 경성으로 이주, 경성농업학교鏡城農業學校에 영어 교사로 취직. 「오리온과 능금林檎」을 《삼천리》에 발표. 이 무렵 순수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서정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 |
1933년(26세) |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문학동인회 구인회九人會를 함께 창립함. 창립회원은 김기림金起林, 김유영金幽影, 유치진柳致眞, 이무영李無影, 이종명李鍾鳴, 이태준李泰俊, 이효석李孝石, 정지용鄭芝溶, 조용만趙容萬임. 「약령기弱齡記」, 「돈豚」, 「수탉」, 「가을의 서정抒情」(후에 「독백獨白」으로 개제), 「주리야」, 「10월에 피는 능금꽃」 발표. |
1934년(27세) |
「일기日記」, 「수난受難」 발표. |
1935년(28세) |
차녀 유미瑠美 출생. 「계절季節」, 「성수부聖樹賦」 발표. 중편 「성화聖畵」를 《조선일보》에 연재. |
1936년(29세) |
평양 숭실전문학교(현재의 숭실대학교) 교수로 부임. 평양시 창전리 48 ‘푸른집’으로 이사.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산」, 「들」, 「고사리」, 「분녀粉女」, 「석류柘榴」, 「인간산문」, 「사냥」, 「천사와 산문시」 등을 발표하며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로서 입지를 굳힘. |
1937년(30세) |
장남 우현禹鉉 출생. 「개살구」, 「거리의 목가牧歌」, 「성찬聖餐」, 「낙엽기」, 「삽화揷話」, 「인물 있는 가을 풍경風景」, 「주을의 지협」 등을 발표. |
1938년(31세) |
숭실전문학교 폐교에 따라 교수직 퇴임. 「장미薔薇 병病들다」, 「해바라기」, 「가을과 산양山羊」, 「막幕」, 「공상구락부空想俱樂部」, 「부록附錄」, 「낙엽을 태우면서」 등을 발표. |
1939년(32세) |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취임. 차남 영주煐周 출생. 장편 『화분花粉』을 인문사人文社에서, 단편집 『해바라기』를 학예사에서, 『성화聖畵』를 삼문사에서 발간. 「여수旅愁」를 《동아일보》에 연재. |
이효석 작가 연보 1940년
1940년 |
1940년(33세) |
부인 이경원과 사별(2월 22일). 3개월 된 영주를 잃음. 장편소설 『창공蒼空』을 총 148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 1941년 단행본으로 간행될 때에는 『벽공무한碧空無限』으로 개제改題. 「은은한 빛」, 「녹색의 탑」 등을 일본어로 발표. |
1941년(34세) |
『이효석단편선』과 장편소설 『벽공무한』을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출간. 「산협山峽」, 「라오콘Laocoȏn의 후예後裔」, 「봄 의상衣裳(일본어)」 「엉겅퀴의 장(일본어)」 등 발표. 부인과 차남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며 중국, 만주 하얼빈 등지를 여행. |
1942년(35세) |
5월 초 결핵성 뇌막염으로 진단을 받고 평양 도립병원에 입원 가료. 언어불능과 의식불명의 절망적인 상태로 병원에서 퇴원 후, 5월 25일 오전 7시경 자택에서 3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임종은 부친과 친구 유진오 그리고 지인 왕수복이 함께 지켰음. 유해는 평창군 진부면에 부인 이경원과 합장됨. |
1943년 |
유고 단편 「만보萬甫」를 《춘추春秋》에 게재. 단편선집 『황제皇帝』가 박문서관에서 간행됨. 「향수」, 「산정山精」, 「여수」, 「역사」, 「황제」, 「일표一票의 공능功能」이 함께 수록되어 발간됨. 5월 25일 서울 소재 부민관에서 가산可山의 1주기 추도식 열림. |
1945년 |
이효석의 부친 이시후李始厚 별세(1882~1945). |
이효석 작가 연보 1959년~1999년
1959년 |
1959년 |
장남 우현禹鉉에 의해 편집된 『효석전집孝石全集』 전 5권 춘조사春潮社에서 발간. |
1962년 |
이효석의 모친 강홍경康洪卿 별세(1889~1962). |
1971년 |
차녀 유미瑠美에 의해 『이효석전집』 전 5권 성음사省音社에서 재발간. |
1973년 |
강원도 영동고속도로 건설로 진부면 논골에 합장되었던 가산可山 부부 유해를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함. |
1980년 |
강원도민의 후원으로 영동고속도로변 태기산 자락에 가산 이효석 문학비 건립. |
1982년 |
10월에 열린 문화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됨. |
1983년 |
장녀 나미奈美에 의해 『이효석전집』 전 8권 창미사創美社에서 발간. |
1998년 |
영동고속도로 확장개발공사로 묘소가 경기도 파주시에 소재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됨. |
1999년 |
강원도 평창군 주최로 봉평에서 지역민과 함께 하는 효석문화제 창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