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李孝石)은 아호가 가산(可山)이고 필명으로 아세아(亞細兒), 문성(文星)을 쓰기도 했다. 전주 이씨 안원대군(安原大君)의 후손으로 1907년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에서 태어났다. 1920년 3월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1930년에 동 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했다. 어린 시절의 이효석은 한학자인 부친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는 이인직(李仁稙)의 「혈의 누」(1907), 최찬식(崔瓚植)의 「추월색」(1912) 및 「안의 성」(1914) 등의 신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에 심취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는 서구문학을 탐독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길렀다. 특히 체호프(Anton Chekhov)의 단편소설,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의 시,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낭만주의 문학, 존 밀링턴 싱(John Millington Synge)의 희곡 및 헨리크 입센(Henrik J. Ibsen)의 현대 드라마 등을 읽고 받은 영향은 이효석 문학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학사학위 논문제목은 ‘The Plays of John Millington Synge, 1871~1909’이었다.
이효석은 경성제대 재학 중 단편 「도시와 유령」(1928)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초기 작품은 당대의 지배적 정치이념이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무렵의 작품은 첫 창작집 『노령근해(露領近海)』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유진오(兪鎭午), 이무영(李無影), 채만식(蔡萬植), 유치진(柳致眞), 박화성(朴花城), 조벽암(趙碧巖), 엄흥섭(嚴興燮), 최정희(崔貞熙) 등과 함께 동반자 작가로 간주되었지만, 당대의 많은 ‘카프’ 계열 작가들과는 달리, 좌익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효석의 좌익 동조는 193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맞추어 그의 작가적 성향은 서서히 순수문학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1933년에 그가 김기림(金起林), 이태준(李泰俊), 유치진(柳致眞), 정지용(鄭芝溶), 이무영(李無影), 조용만(趙容萬), 김유영(金幽影), 이종명(李鐘鳴) 등과 함께 순수문학의 가치 아래 구인회(九人會)를 창립한 것도 우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돈(豚)」,「산」,「들」,「분녀(紛女)」,「수탉」, 『화분(花粉)』 등 주요 작품을 썼고, 1936년에는 단편문학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는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장편소설 『창공(蒼空)』(단행본 발간 때는 『벽공무한(碧空無限)』으로 개제)을 썼고,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강행하자 일어로 장편소설 『녹색의 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이효석은 오늘날 소설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뛰어난 수필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명품 에세이 「낙엽을 태우면서」 및 「청포도의 사상」을 비롯한 많은 수필이 널리 애독되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이효석은 당대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보급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효석은 대학을 졸업한 후 한때 생활고를 겪은 바 있다. 하지만 부인 이경원과 결혼한 이듬해 경성농업학교에 부임하며 교직과 글쓰기를 병행하기 시작한 그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온갖 생활의 향기를 누렸다. 특히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래 그는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비롯한 역작들을 다수 발표하며 문학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1940년 2월 22일 평양에서 아내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다.
그리고 이내 그에게도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그는 1942년 5월 3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인한 고열로 신음하기 시작했고 5월 7일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한 후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다. 열흘 후에 말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5월 22일 의사로부터 절망적인 선언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고, 5월 25일 아침 7시 30분에 삶을 마감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에 불과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여 고향인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하였다. 1973년 도로 개설로 인해 그의 묘지는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변으로 옮겨졌지만, 1998년 9월에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될 때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이효석이 세상을 뜬 후 1959년에는 춘조사, 1971년에는 성음사 그리고 1983년에는 창미사, 2016년 12월 (재)이효석문학재단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이 공동 작업으로 이효석 결정판 정본전집을 발간했다.
오늘날 시중에는 수백 종에 달하는 작품집이 발간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산」,「들」,「돈(豚)」,「메밀꽃 필 무렵」등의 소설과「낙엽을 태우면서」,「화초」,「청포도의 사상(思想)」등의 수필은 1948년부터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왔다.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에서 부친 이시후(李始厚)와 모친 강홍경(康洪卿)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출신으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이효석은 「나의 수업시대」에서 부친의 직함을 사관(仕官)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1911년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의 자서전을 편역하였고, 그 후 다시 평창으로 내려가 봉평(蓬坪)·진부(珍富)면장으로도 봉직하였다. 그는 1942년에 아들 효석을 잃고 그 충격으로 수년간 중풍으로 고생했으며,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2년여 동안 사법서사 대서소(司法書士代書所)를 운영하였다. 그는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4월 10일 별세했다. 모친 강홍경은 본관은 곡산(谷山), 원적은 강원도 홍천군이었다. 1907년에 장남 이효석을 얻은 후 계원, 정원, 계숙 등 3녀를 더 두었다. 강홍경은 언문성서(諺文聖書)를 탐독하는 옛 성결교단(聖潔敎團) 교회의 집사로 신앙심이 강했다. 1962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서구문화 동경과 구라파주의
이효석은 용모가 세련되고 단아한 문인이었다. 온유한 성격에 굳센 의지와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던 그는 서구문화를 절실히 동경했고, 그런 면모는 실생활과 작품 속에 잘 반영되었다. 그러나 그의 서구문화 동경이나 구라파주의는 체계적 이념이라기보다 실생활에서 느끼고 체현되는 삶의 방식이었다.문학과 예술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
이효석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날의 생활과 예술”이라고 하였고, “인간 중 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였다. 또 그는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현재의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이 자기의 숙명이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작가 이효석
이효석은 주로 소설을 써서 발표했지만 습작기에는 시를 썼고, 희곡과 시나리오, 평론과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유명 작가로 알려지면서 그는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으며 문학가라는 직분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적 능력과 의욕이 왕성했던 그는 미처 15년이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소설, 수필, 시와 평론을 포함한 모든 Genre에 걸친 문학작품을 남겼다.교육자 이효석
이효석은 경성농업학교 교사,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교직에서 그는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유럽 작가들의 작품을 낭송해 주는가 하면, 입센, 토마스 만, 콕토의 작품을 해설해 줌으로써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