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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슬기로운 문학생활] [18] 숏폼 시대 벽돌책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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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5회 작성일 25-11-0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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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의 한 서점에서 두꺼운 책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다.

가을 내내 벽돌책을 붙들고 있었다.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 이 작품은 종이책 번역본 기준으로 2권 1416쪽에 이르는 그야말로 ‘장편’소설이다.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영국 중부 지방의 가상 도시 ‘미들마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다.

독자의 문해력과 참을성이 갈수록 줄어드는 시대에 이렇게 두꺼운 소설을 왜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장편소설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많은 이가 단편을 늘리면 장편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학 장르로서 단편과 장편은 완전히 다른 분야에 가깝다. 같은 달리기라고 해도 100m 달리기와 마라톤이 비슷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단거리 선수와 장거리 선수는 훈련 방법부터 근육의 모양, 레이스 전략까지 전부 다르다.

단편이 삶이라는 커다란 빵의 단면을 날카롭게 잘라내어 우리 앞에 보여주는 장르라면, 장편은 빵 그 자체를 내미는 장르랄까. 소설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가 장편소설을 뜻하는 ‘Novel’이며 소설가란 ‘Novelist’, 즉 장편을 쓰는 사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근대 문학의 결정체는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편소설은 긴 호흡 속에서 우리에게 일종의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삶의 찰나가 아니라 삶 그 자체, 살아가고 움직이고 얽히고 변화하는 총체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70명이 넘는 ‘미들마치’ 속 인물들의 서로 다른 욕망과 분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총체적 시각을 갖게 되고, 작품은 구체적 초상을 모아 시대와 세계에 관한 보편적 추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이 가을에는 벽돌책을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벽돌은 벽을 세우지만, 벽돌책은 우리의 내면을 든든히 쌓아줄 테니.

문지혁 소설가 [조선일보 박성원 기자, 입력 2025.11.03.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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