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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孝石의 소설 -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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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1건 조회 3,564회 작성일 19-07-0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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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나는 얘기들

李孝石의 소설

趙 容 萬
(영문학자·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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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민 유진오(玄民 俞鎭午)는 이효석(李孝石)의 인상을 “고귀한 향기를 가진 아름다운 서양초화(草花)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였는데, 아주 적절한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키에 얼굴은 동글납작하고, 곱상스럽게 생긴 그는 우락부락하다든지 앙칼지다든지 하지 않고, 얌전하고 안존한 여자 같은 인상을 준다. 음성도 나직나직하여 결코 격하지 않고, 독한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걸음걸이도 사뿐사뿐 땅이 꺼질까봐 겁을 내는, 그런 걸음걸이다.

  그는 나보다 2년 선배이어서 내가 대학 1학년 때에 3학년 졸업반이었다.

  그때는 3년 동안에 스물 네 학과를 따고 졸업논문을 내면, 대학을 졸업하여 학사호를 받게 되었다. 지금 같은 학점제가 아니라 학과목제여서, 3년 동안에 전공을 두 개 더 따면 된다. 이 때문에 부지런히 공부해서 유유히 졸업논문만 쓰면 되었다. 이효석이 그런 예로 그는 2학년까지에 스물 네 학과를 통과해 놓고, 3학년에 올라서는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 1898~1964) 선생의 남은 한 과목과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다.

  블라이스 선생의 현대영시 강독(講讀) 시간은 금요일 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였다. 이효석은 집에서 논문을 쓰고 한 주일에 한 번 금요일 오후에 학교에 나타났다. 이 강의는 주로 3학년만 듣게 되었고, 1학년은 들을 수 없게 되었는데, 나는 비공식으로 이 강의에 출석해서, 수강신청을 써내지 않고 자유롭게 듣고 있었다. 왜 그런고 하니 블라이스 선생은 시험을 보아가지고 그것으로 성적을 내지 않고, 평소에 강독을 시켜보아서 그것으로 점수를 매겨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빠지기 위해서 나는 수강신청을 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1학년 학생으로 이 강의에 출석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것은 선생이 지정하는 시를 읽고 그 시를 감상 비평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영어로 시를 감상 비평한다는 것은 1학년 학생으로는 힘에 부치는,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이효석은 신발 소리를 내지 않고 살짝 교실 뒷문으로 들어와서 맨 뒤에 앉았다가 선생의 지명을 당한 것인데, 그는 조용히 침착하게 선생이 지정한 존 프리먼(John Frederick Freeman, 1880~1929)의 「노벰버 스카이스」(동짓날의 하늘)를 읽고, 해석하고, 감상 비평해 나갔다.

  십여 분에 걸쳐서 이 힘드는 작업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블라이스 선생은 조용히 “엑설런트!” 하고, 평점을 발표하였다. 우수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지금 미스터 리가 훌륭히 감상해 나갔으므로 나로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러나 중복하는 셈치고, 설명한다고 하면서 다시 설명해 나갔다.

  그는 매우 조숙한 편이어서 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학) 때부터 신문에 투고해서 상을 탔다. 나중에 술좌석에서 그것을 자랑했지만, 그의 연보(年譜)를 보면 4학년, 5학년 때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시(詩)와 콩트를 발표하여 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한 것은 1928년 대학 2학년 때에 잡지 《조선지광(朝鮮之光)》(7월호)에 단편 「도시(都市)와 유령(幽靈)」을 발표한 뒤부터였다.

  그 당시의 문단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채를 잡고 있어서, 좌익색채를 띠지 않은 작품은 발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발표된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문학 측의 두 비평가 팔봉 김기진(八奉 金基鎭, 1903~1985)과 회월 박영희(懷月 朴英熙, 1901~1950)의 손에 걸리면 여지없이 혹평을 받게 되어서 망신을 당했다. 다행히 이효석의 「도시와 영혼」은 그 다음 달 같은 잡지 《조선지광》 8월호에 김기진이 대단히 좋은 평을 했다. 김기진의 눈에 들면 그때는 신진작가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어느 잡지에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된다. 이효석은 이렇게 해서 그 이듬해인 1929년, 대학 3학년 때에 《조선지광》 6월호에 단편 「기우(奇遇)」를 발표했고 같은 달인 6월에 잡지 《조선문예(朝鮮文藝)》에 단편 「행진곡」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다.

  그 이듬해 1930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는데 그때는 당당한 신진작가가 되엇, 잡지 《대중공론(大衆公論)》 4월호에 단편「깨뜨려지는 홍등(紅燈)」, 잡지 《신소설(新小說)》 5월호에 단편 「추억(追憶)」, 《대중공론》 6월호에 「상륙(上陸)」을 발표했고 8월호에는 《조선일보》에 단편 「마작철학(麻雀哲學)」(10회), 《신소설》 9월호에는 「북국사신(北國私信)」, 「삼천리」, 10월호에는 단편 「약령기(弱齡記)」를 발표하여 갔다.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이효석하면, 짝패로 늘 붙어 다니는 현민 유진오에 대해서이다.

  兪는 중학 때부터 이효석의 1년 선배였다. 유는 유명한 수재로 졸업할 때에 우등 첫째였고, 한 반 아래 李는 첫째는 아니지만 우등으로 졸업해서 동아일보에 사진까지 났었다. 똑같이 문학지망이었는데, 대학 예과 때에는 李가 대학 법과로 올라가는 문A반이었다가 대학에 올라갈 때에 문B 영문과로 옮겼고, 兪는 문A반이었다가 대학에 올라갈 때에 문B 철학과로 옮기려고 했지만 개과(改科) 기한이 늦어서 옮기지 못하고, 그냥 대학 법과로 올라갔다.

  兪도 일찍부터 신문에 투고하여 실력을 쌓아 올려 가지고, 1927년 《조선지광》 9월호에 단편 「스리」를 발표하였다. 대학 2학년 때 일이었다.

  그때 일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대항하는 신흥문예파 문학운동이 일어나서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 1898~1947),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 등이 그 주동 인물이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그때 모든 문화운동이 일본을 따라갔다.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이 성해져서 ‘나프(NAPF: Nippona Artista Proleta Federacio,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란 것이 결성되어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면, 얼마 안 가서 서울에서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란 것이 결성되어서 일본과 나란히 좌익문학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본의 신흥예술파 운동에는 여러 파벌이 있었지만, 위에서 말한 요코미쓰 리이치 등의 신감각파(新感覺派)가 가장 세력이 두드러진 중심 세력이었다.

  유진오의 단편 「스리」는 이 요코미쓰의 신감각파의 냄새가 짙은 작품이었다.

  그때 좌익잡지 《조선지광》에 매월 「문예시평(文藝詩評)」이란 제목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아닌 부르주아문학 즉, 순수문학에 대해서, 무서운 칼날을 휘두르고 있던 김기진은 좋은 밥이 걸렸구나 하고 소설 「스리」를 한마디로 “이 무슨 교태嬌態이뇨!” 하고 혹평해버렸다.

  그러나 그 소설은 한마디로 혹평해 버릴 작품이 아니었다. 유진오는 김기진의 혹평에 굴하지 않고 그냥 그런 작품을 써 가다가 어느덧 전향해서 이효석과 함께 동반자(同伴者) 작가가 되었고, 또다시 전향해서 순수문학 작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효석이 대학 3학년으로 우리와 같이 블라이스 선생의 강의를 들을 때에는 이미 당당한 신진작가이어서, 양복도 학생복이 아닌 감색 신사복을 입었고 붉은 넥타이에 구두도 에나멜이 반짝이는 멋쟁이 구두를 신고 다녔다. 블라이스 선생의 강의가 끝나면 우리들 하급생들은 본체만체하고 쭈르르 兪한테로 갔었다. 그때 兪는 형법(刑法) 교실의 조수로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형법 교실의 조교였던 것이다. 兪는 그 방에서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같이 나와서 교정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때 효석의 가까운 친구에 김유영(金幽影) 이라는 젊은 영화감독이 있었다. 김유영은 ‘서울키노’라고 하는 영화사를 차려놓고, <유랑(流浪)>, <화륜>, <혼가(昏街)>, <지하촌(地下村)> 같은 좌익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때 그는 여류작가 최 모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원서동 휘문학교 뒷골목에 살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집도 원서동이어서 아침에 출근할 때면 그 집 골목을 통과해야 하는데, 최 여사가 골목길에 화덕을 내놓고 부채질로 불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지냈다. 효석이 1929년에 시나리오 『화륜』을 《중외일보》에 발표한 것은 김유영이 종용한 것으로, 1931년에 그 시나리오를 가지고 김유영은 김정숙(金靜淑), 백하로(白河路)를 주연으로 해서 좌익영화 <화륜>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수준급이라는 세평을 얻어서 이것에 기운을 얻어가지고 김유영은 같은 해에 영화 <혼가>, <지하촌>의 두 편을 연속 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좌익 측과 손을 끊고 그 반대편인 순수문학 쪽에 가담해서 이종명(李鍾鳴)과 함께 순수 문학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33년에 구인회가 결성될 때에 김유영은 이효석을 억지로 경성(鏡城)에서 불러올려서 발회식에 참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두 서너번 구인회 회합에 나오더니 9월경에 별안간 김유영과 이종명이 구인회를 탈퇴하겠다고 통고해왔다.

  그리고는 어떻게 된 셈인지 김유영과 이종명은 일절 나타나지 않고 집으로 찾아가도 없었다.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여도 도무지 만날 수가 없었다. 오늘날까지 이 두 사람의 소식은 생사간에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 뒤로 문필 활동을 안 했고 김유영은 영화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늘어놓은 구인회 이야기는 이효석이 서울에서 한바탕 소란을 겪고, 경성으로 가서 농업학교 선생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이에 앞서서 서울에서 겪은 이야기가 있다.

  대학 영문과를 좋은 성적으로 나왔으므로 곧 취직이 될 줄 알았고, 학교 선생이든지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는 취직이 아주 힘든 때여서 대학 졸업생들이 모두 놀고 있었다. 문과 졸업생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직업이란 첫째로 학교 선생이고, 둘째로 신문기자, 그 다음이 관청의 고원(雇員)이 되는 길이다. 그때는 레코드 회사가 많이 생겨서 이 레코드 회사의 문예부장이 되어서 지방으로 레코드 선전을 하러 다니는 일도 있었고, 방송국이 갓 생겨서, 거기 한 자리를 비비고 들어가서 프로그램 만드는 것을 거드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모두 하늘에 별 따기이고 걸리기 쉽지 않았다.

  이효석은 소설가로 이름은 알려졌지만, 수입은 없었다. 그때는 원고료는 생각도 못할 때여서, 잡지사에서도 줄 생각을 안 했고, 집필자도 받을 생각을 못했다. 1931년, 졸업하던 이듬해에 그는 결혼하였다. 결혼생활을 하려면 어디고 취직을 빨리 해야 하겠는데, 사방팔방으로 취직자리를 구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이것을 딱하게 보고 있던 옛날 제일고보 선생이었던 구사부카(草深) 선생이 총독부 정무국 도서과(圖書課)의 사무관으로 있었는데, 조선문(한국어) 잡지의 검열을 맡아볼 전문 검열관(檢閱官)이 한 사람 필요해서, 그 자리에 이효석을 채용하였다. 도서과 고원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문필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집필자가 거꾸로 검열관이 되다니 사방에서 욕설과 비난이 빗발치듯 했고, 효석 자신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열흘쯤 뒤에 사표를 냈다. 부인과 함께 처가인 경성으로 내려가서 농업학교 선생이 되었다. 이때가 구인회가 시작될 때여서 싫은 것을 억지로 김유영의 성화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 뒤 얼마동안 경성에 있다가 평양에 있는 숭실대학에서 그를 초빙해서 영문과 교수에 임명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완전히 프롤레타리아 작가임을 떠나서 또는 동반자 작가임을 떠나서 자유로운 한 사람의 순수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1940년 34세 때에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또 얼마 안 가서 둘째 아들을 잃었다. 이 슬픔으로 그는 만주 지방을 방황하기도 했다.

  그는 장편 『벽공무한(碧空無限)』을 출판한 뒤에 다음 해인 1942년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어서 5월 25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각하면 그는 아름다운 일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외모부터 남자답지 않게 곱상스럽고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이었고 마음씨는 더 고와서 남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음식은 골라서 맛있는 것만 좋아했고 커피와 값비싼 빵을 좋아했고, 양식을 좋아했다. 텁텁한 막걸리, 순대국, 선지국 같은 것은 입에 대기를 싫어하였다. 술도 좋아하는 것은 값비싼 양주, 마지못해 청주를 마셨지, 약주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문단에 나타날 방편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 같은 작품을 썼지,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카프’ 사람들이 끈질기게 가맹할 것을 요청했지만 듣지 않았고 동반자 작가라는 것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평양의 변두리 창전리(倉田里)로 이사한 뒤에 달리아, 샐비어, 석죽이 만발한 꽃밭 속에서 그는 「분녀(粉女)」, 「산」, 「들」, 「고사리」 같은 아름다운 작품을 썼고 마침내 「메밀꽃 필 무렵」 같은 불후의 작품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길을 바로 찾아든 것이었다.

  대학 때 ‘현대영시 강독’ 시간에, 블라이스 선생이 낭만시인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의 유명한 문구―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즐거움이니라”고 한 것을 설명할 때에 이효석은 눈을 빛내면서 대단히 감격하는 모습으로 듣고 있던 것을 나는 옆자리에서 목격(目擊)하였다.

  그의 소설의 주조(主調)는 유미(唯美)주의적이었고 탐미(耽美)주의적이었지, 결코 프롤레타리아 문학적이 아니었음을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


(본고는 가산 이효석의 경성제국대학교 후배인 조용만(趙容萬, 1909~1995) 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글을 현대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 등에 맞추어 교정하고 주석을 추가한 판본이다.)
(최초 출전: 월간 《춤》 199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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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님의 댓글

채은 작성일

재단 분들께서 이효석선생님의 자료도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