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가와 문학의 세계(6) - 식민지 시대의 탐미주의자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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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1건 조회 4,722회 작성일 19-04-22 14:30본문
식민지시대의 탐미주의자
- 이효석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봉평의 효석 생가를 찾으면서, 머리 속에는 문득 두 개의 그림이 떠올랐다.‘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메밀꽃 핀 봉평 산길과 눈 덮인 황량한 들판을 정처없이 걸어가는「삼포가는 길」(황석영)의 겨울 들판이 이상하게도 하나의 영상처럼 교차되어 떠오르는 것이다. 아직 메밀꽃이 피지 않은 5월의 팍팍한 진부리 고갯길 위에 섰을 때, 그‘길’이 자아내는 낯선 정서와 맞닥뜨리면서 일어난 영화적 상상력이었을까. 한국 소설에는‘길’이라는 모티브가 많이 등장한다. 시대와 배경은 다를지언정 고향에서 뿌리뽑힌 채,
낯선 타향의 길 위를 떠도는 불행한 주인공들은 이상하게도 고향을 두고도 고향상실증의 허전함에 시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효석의 글 중에‘나는 한결같이 마음속에 형상 없는 고향을 느꼈다. 잃어진〈고향〉이 그리웠다’(수필「단상의 가을」)라는 구절이 있다. 타고난 탐미주의자로, 또한 ‘귀족의 문학’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한 취향과 작품세계를 보인 효석이었으나, 그 내면에는 간혹 핍진한 실향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고향 봉평은 어떤 의미였을까.
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은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영서지방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평창 또는 봉평하면, 곧 이효석의「메밀꽃 필 무렵」이 연상될 정도로 지금은 그 지명이 널리 알려졌으나, 이곳은 율곡의 부친이 판관으로 봉직했을 때 신사임당이 율곡을 회임(懷姙)한 회임지이기도 하며, 율곡의 사당인 봉산서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평을 그냥 평창에 포함시켜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필자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어서 무조건 평창에만 내리면 되는 줄 알았다가 낭패를 본 이 중의 하나다. 그러나 장평을 사이에 두고 그 길이 삼각형의 두 변처럼 나뉘어져 있음을 어찌 알았으랴. 장평에서 영월 쪽의 행로를 잡으면 평창이 나오고, 영동고속도로를 나란히 하여 원주 쪽으로 방향을 틀면 봉평에 다다른다. 초행객이라면 필히 지도를 한번 더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곳 봉평에서 대화까지가 또 칠십여 리(28킬로미터). 장평과 평창 그리고 봉평은 흡사 삼각형의 세 꼭지점의 형국을 하고 있다. 허생원이 충만한 달빛을 받으며 넘어가던 그 산허리의 메밀밭길을 상상해 볼 법하나, 이제는 감자와 옥수수밭이 더 많이 눈에 띌 만큼 변해 버린 길들이다.
봉평 장터는 흔적이 남았을까. 봉평읍 대로에서 남안교 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봉평 중·고교 못미쳐 봉평시장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골목이 바로 옛 봉평 장터의 현주소이다. 터는 옛 그대로라 했다. 그러나 길 가운데를 막아선 현대식 5층 건물의 흰 빛이 자못 새침하다. 숯불갈비집, 노래연습실, 치킨집 등이 늘어서 있는 단층 슬레이트 가옥들 앞에 봉고, 트럭, 오토바이들이 늘어서 있다. 예서 토속 장터의 걸쭉한 모습을 그 속에서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문득‘이효석 생가 1.2킬로미터’라고 선팅이 된 모밀국수 전문점 두레박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가다보니, 헤어숍 간판 밑으로「메밀꽃 무렵」발표 60년, 이효석 탄생 90년-메밀꽃 축제’라고 쓰인 현수막도 이채롭다.
그 윗길로 조금 나가노라면, 왼편으로 마치 새로 문을 연 전시장처럼 깔끔하게 단장된 가산공원의 전경을 볼 수 있다. 3백 평 남짓한 공터 한가운데 채 다 자라지 않은 잔디와 껑충하니 키만 높은 나무 몇 그루를 배경으로 덩그라니 놓인 이효석 동상, 그리고 그 옆으로 김우종 선생의 비문이 길다랗게 적힌 문학비가 놓여 있다. 동상 뒤로 돌아가 보니, 세운 연대가 1993년이다. 공원의 전경이 앳되어 보인 이유를 알겠다.
홍천천 흐르는 남안 다리를 건넌다. 장돌뱅이 허생원이 성씨 처녀와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아간이 감쪽같이 복원된 채 과객의 시선을 흐뭇하게 한다.‘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려 물레방아간에 들어가질 않았나’는 소설 속의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기념비의 문구가 간지럽다.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메밀꽃 필 무렵」이고 보면, 이만큼이라도 흔적을 복원시켜 놓은 것이 어딘가 싶다.
소설 속의 물레방아간은 그 일부라도 복원된 반면, 생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안동 언덕 위에 수년 전만 해도 생가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나, 필자가 갔을 때는 밭으로 변해 있었다. 생가터 기념 표지석만이 쓸쓸하게 현장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기념공원과
물레방아간은 효석 문학의 안내문 같은 것이고, 마지막 발걸음이 머무는 생가는 이효석 문학의 실체와 정수를 기리는 기념관의 모습을 띠고 있어야
구색을 갖춘 것일 텐데, 이러한 불일치는 방문자를 곤혹에 빠뜨려 놓기에 충분했다. 이곳에서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에 한 작가가 태어났고,
문명을 날리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곳 남안동 주민들은 기억할 터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효석이라는 작가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 있는 것일까.
2.
이효석은 호적상으로는 진부면 하진부리 142번지가 본적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 출생한 곳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이다. 이효석의 부친 이시후는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한때 진부 면장을 지낸 적이 있을 만큼 이 지역에서는 알려진 인물인데, 그래서인지 진부로 우기고 봉평 사람은 봉평이라 우기는 일도 간간히 있는 모양이다.
1907년 2월23일, 이효석은 그의 모친이 용꿈을 꾸었다는 아낙에게 논 몇 마지기로 꿈을 사서 잉태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주변의 촉망을 받으며 태어났다. 5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일찍이 재능을 보였던 까닭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실제로 평창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무시험 전형으로 경성 제일고보에 입학하였다. 또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진학해서도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자면 신동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효석이 문학에 열을 쏟기 시작한 것은 경성고보 시절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효석은 당시 학생들이 주로 탐독하던 러시아 작가들 외에도 토마스만, 캐서린 맨스필드 등의 심미주의 계열의 작가들에 빠져들어 문학적 감수성을 길러 나간다. 뒤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영국 문학을 위시한 외국 문학을 섭렵하는데, 훗날 ‘버터 냄새나는 작가’라는 닉네임은 이같은 독특한 독서 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로렌스나 케셀 등에게서 받은 영향은 훗날「성서(聖書)」나「들」에서 보이는 성(性)에 대한 탐미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수필「첫 고료」에 의하면, 그는 이미 고보 상급학년 시절부터「매일신보」문예면에 콩트 등을 투고하여 수시로 게재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효석의 1년 선배이자 절친했던 문우 유진오도 효석이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익명으로 응모하여 상금을 탔고, 그 턱으로 여러 번 얻어 먹은 일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효석이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였다. 유진오, 최재서, 조용만, 이희승 등의 예과 동인 기관지였던「문우」와 교우지「청량」에 당시 그가 발표한 작품들이 게재되어 있다. 물론 아직은 습작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다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1928년 본과 2년이던 해에「조선지광」에 단편「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작품에서 효석은 건축 공사장의 미장이인 주인공을 통해서 거지들만이 득실거리는 서울의 비참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즉 ‘도시의 유령’(즉 거지)들이 ‘살기는 살았어도 기실 죽어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이런 비논리적 유령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독자들을 일깨운다. 그리고 작품 끝부분에 이르면 ‘현명한 독자여! 무엇을 주저하는가. 이 중하고도 큰 문제는 독자의 자각과 지혜와 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와 같은 선동구호를 덧붙여, 마치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이 작품을 계기로 이효석에게는 ‘동반작가’라는 평이 따라붙게 된다. 이후로도 이효석은「행진곡」,「노령근해」,「북국점경」등 동반자 계열의 작품을 줄곧 발표하여, 유진오와 더불어 대표적 동반작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당시 경성제대 출신 신예작가로서 이효석의 인기가 어떠했던가는 1930년 여름에「조선일보」에서 가장 인기 있는 ‘5대 작가’의 단편을 연재했는데, 여기에 효석이 「마작철학」을 발표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인기에다가 효석의 독특한 행동 역시 세인들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술은 두주(斗酒)급이었고 의복은 대단히 스마트하게 차렸으며, 칠피단화에 나비 모양의 장식을 붙인 구두를 신고 다녔다. 또한 축음기와 레코드판을 소유하고 있었을 만큼 음악과 영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말하자면 작품에서는 가난한 민중과 어두운 현실을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다분히 부르주아적이었고, 탐미적이었다.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런 이중적인 모습에서, 효석의 동반자적 작품이 진정성이 결여된, 시류에 편승한 것이라는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효석이 당시 이처럼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섬세한 대타의식을 지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소설가 최정희는
효석을 ‘계집애 같은 남자’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효석씨의 인상은 '계집애 같은 남자'로 보였다. 웃음을 화알 내어 웃지 아니하고, 입을 조물거리며 웃는데 얼굴까지 발개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몸짓이라든가 키가 작고 살결이 희었으니 '계집애 같은 남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 최정희 ?'노령근해' 무렵의 이효석? 중에서
섬세한‘계집애 같은 남자’가 바로 효석이었다. 이 같은 섬세함이 주변에 대한 민감한 대타의식으로 드러났는데, 최정희는 효석이 싸구려 밥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항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이런 싼 밥을 먹는 것을 누가 보면 어쩌나’,‘아는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쩌나 그저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외부인들의 평가와 질시였고, 그래서 자신의 본래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내재화되었던 셈이다. 이런 성향이 결국은 경향문학이 문단을 휩쓸던 20년대 후반에, 자신의 본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그것에 동조하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인기작가로서의 화려했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학교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효석은 일본인 은사의 주선으로 잠시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하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변절자’라는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비난 속에서 효석은 ‘졸도를 할’만큼 충격을 받고 그의 문학적 진로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유진오도「이효석과 나」에서 이 시기에 대해서 회고한 바 있는데, 그에 의하면 효석은 이 사건 이후 종래의 ‘동반자’적 태도에서 순수문학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효석은 한동안 실의에 빠져서 이렇다 할 작품도 쓰지 못하고 지내다가 처자가 있는 함북 경성으로 낙향한다. 당시 효석은 대학 3학년 때 만난 18세의 처녀 이경원과 결혼한 직후였다. 경성에서 효석은 농업학교 영어 교사를 하면서 점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특유의 탐미적 성향을 본격적으로 내보이기 시작한다. 효석은 식민치하의 현실에 극도의 반감을 가졌고, 항상 새로운 것을 동경하였다. 그래서 오직‘문학의 심미역(審美役) 이야말로 환멸에서 인간을 구해내는 높은 방법’이 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실제 생활이라는 것은 ‘물 위에 뜬 해꺼운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효석이 평양 시절에 부근의 주을(朱乙) 온천의 이국적 분위기에 젖어들었던 것은 이같은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을온천에는 외인(백계 러시아인) 별장지대인 ‘노비나촌’이 있었다. 소설「화분」이나 수필「주을의 지협」,「주을 가는 길에」속에 이 주을온천의 이국적 정취가 그려지는데, 효석은 이 이국적 분위기에 흠뻑 빠져든다. 그는 그곳에서 바닷바람을 쏘여가며 자기만의 문학세계에 정진하며, ‘극도로 생략된 아름다운 문체를 수득’하는 것이다. 경성 생활이 끝나던 무렵에 발표된「돈(豚)」은 이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후 효석은 동반자적 경향의 작품을 청산하고 성과 자연에 대한 탐미로 나가게 된다.
193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효석 문학은 바야흐로 활짝 꽃피게 된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 화초가 많이 피어 있는
창전리의 ‘푸른 집’으로 이사한 그는 1남 2녀와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창작에만 몰두, 역작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의
6년간이 효석의 절정기였던 셈이다. 「화분」,「계절」,「성서」(35)외에도「분녀」,「산」,「들」과 같은 순수 서정소설들이 1936년에
발표되었고, 바로 그 해에 대표작「메밀꽃 필 무렵」이 탄생하였다. 이밖에도 수많은 수필과 중요한 중·단편, 장편들을
써내니「삽화」·「개살구」·「거리의 목가」(37)「장미 병들다」·「부록」·「해바라기」(38),「여수」·「산정」·「황제」·「향수」·「일표의
공능」(39),「벽공무한」·「하르빈」(40)등이 모두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온 작품들이다. 평양시절, 그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흑구는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원고를 구하러 가끔 그의 집을 찾아가면, 하학 시간 후에도 집에 있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귀히 여기고, 규칙적인 생각을 좋아하는 서양품의 신사와 같았다. 그러나 서양풍의 사교는 좋아하지 않고, 언제나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그는 늘 혼자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를 마나기 쉬운 곳은 다방이었고, 서양 고전음악의 판이 늘 돌아가고 있는 세르팡 다방이었다…… 그는 옷도 서구적인 것을 좋아했고, 음식도 서구적인 것을 좋아해서, 평양 사람이 즐겨먹는 냉면도 맛이 없다고 했다……그는 대동강 빙상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지 않으면 스키를 갖고 오르는 것이 겨울방학의 일과이다 싶었다.
-한흑구, ?효석과 석훈(石薰)?중에서
그러니까 이 당시 이효석은 1940년대를 전후한 당시의 세계 정세나 일제 말기의 어두운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이국적인 취미생활을 누리며 지극히 안정된 생활을 향유했던 셈이다.
1938년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되면서 잠시 교단을 떠났던 그는 1939년 대동공전의 교수로 다시 취임하였으나, 1940년에 아내와 사별하고 이윽고 차남 영주를 잃는 등 시련을 겪으며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건강도 안 좋았고, 창작의 기력도 쇠퇘해 가고 있었던 그에게 어느날 병마가 덮쳤다. 1942년 5월 3일 그는 학교에 나갔다가 심한 감기
증세를 느끼고 귀가하여 곧 드러눕게 되는데 알고 보니 결핵성 뇌막염이라는 무서운 병이었다. 유진오가 ‘위급’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도착했을 때
그의 병실은 붉은 카네이션, 흰 글라디올러스 등 서양 화초가 화려하게 어우러져 있었다고 한다. 효석다운 병실 분위기였던 셈이다. 끝내 그
상태에서 회생을 못하고 25일 기어이 세상을 뜨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3.
초기에 유진오와 함께 대표적인 동반자 작가로 활동하던 이효석은 이후 이데올로기에서 탈피, 극단적인 성과 자연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하여 섬세한 탐미주의자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초기의 경향성은 대타의식이 강한 효석이 당시 시류에 순응하면서 나온 결과이며, 나중에 그것의 불리함을 깨닫고 문학적인 현실 도피의 방책으로 심미주의에 귀의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는 이효석의 작가적 성향이 현실 도피라는 부정적 성격을 띠고 있더라도, 그 자체를 당대의 흥미로운 문예 현상으로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즉, 이효석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심미주의와 낭만주의는 작가적 체질이 자연스럽게 외화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인정하고 검증하는 것이 연구의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예견했던지 효석은 자신의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메주내 나는 문학이니 버터내 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함과 같이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 없다. 메주를 먹는 풍토 속에 살고 있으므로 메주내 나는 문학을 낳음이 당연하듯 한편 서구적 공감 속에 호흡하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으로서 버터내 나는 문학이 우러남도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효석, ?문학진폭옹호(文學振幅擁護)의 변(辯)?중에서
이렇게 해서 이효석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 바로 자연과 성의 세계였다.
「돈」,「수탉」,「산협」,「메밀꽃 필 무렵」등 효석 소설의 대부분은 농촌이나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에서는 농촌 총각 식이의 슬픈 사랑이 그려진다.「산협」에는 강원도 산골을 무대로 촌민들의 토착적인 삶이 제시되며,「개살구」에는 오대산에 임야를 갖고 있던 김형태가 졸부가 되어 첩을 들이고 후사를 도모하는 내용이 서술된다.「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봉평을 중심으로 평창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묘사된다. 이렇듯 효석 작품의 대부분은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투박한 촌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효석의 자연은 김유정이나 이무영의 그것과는 본질을 달리한다. 이들이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해학과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그들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면, 효석은 농민들의 실제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효석의 많은 작품 속에서 역동적인 효과를 내는 유일한 요인은 ‘성’이라는 이상옥의 지적대로,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성이다. 물론 성은 사랑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진보되어도 야만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은 까닭에 스스로 야만을 부르고 요구하는 것’(「화분」)이며, 따라서 원시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래서 남녀간의 성은 자주 동물들과 대비된다.「돈」에서는 분이에 대한 식이의 그리움이 돼지의 교미 장면과 병치되며,「수탉」에서는 을손의 좌절된 사랑이 닭에 대한 학대로 나타난다.「메밀꽃 필 무렵」에서도 장돌뱅이들의 외로움이 나귀의 발정 장면을 통해서 암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이 어떤 윤리나 가치를 전제한 것이 아닌 까닭에 매우 파격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사랑을 위해서는 아버지와도 연적이 되며(「개살구」), 숙모와 종질간에도 사랑행위가 이루어지고(「산협」), 때로는 동성애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화분」), 이같은 원시적 행동에서 우리는 기존의 도덕관을 부정하는 작가의 대담성을 엿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효석이 동경해 마지 않았던 DH. 로렌스와는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로렌스의 「차타레 부인의 사랑」에서 그려진 분방한 성은 20년대 영국의 억압적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가치관에 비추자면, 미천한 신분의 정원사와 애정 행각을 벌이는 차타레 부인(즉 코니)의 행위는 도저히 용납 받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의 행위는 정상적이지 못한 부부관계에 대한 거부이자 위선적인 상류사회의 도덕관에 대한 도전이다. 로렌스의 말대로, 코니의 사랑은 ‘사회적인 세계의 거대한 허위로부터 자기 자신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석 소설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적·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아니면 탐미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사랑의 행위에 동물들의 교성이나 격렬한 음악이 배경으로 등장한다든지 그것을 엿보는 부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모두 작가의 탐미성과 관계되어
있다. 효석이 당대 심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나, 오늘날에도 문학사에서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처럼 식민치하의 절박한
현실의 외면한 채, 성 자체의 탐미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만일 효석이 사회적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성에 주목했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훨씬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4.
꽃은 양이(洋梨)의 향기가 난다는 장미를 좋아했고 월부로 구입한 야마하 피아노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즐겨 쳤으며, 쇼팽과 영화를 좋아했던 이효석이었다. 소설에 음악이나 영화의 장면과 이름이 자주 나오고 색채와 명암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도 그의 이러한 기호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그는‘애정 없이는 생애 아무런 의의도 가질 수 없다’고 할 만큼 애정절대론자이자 연애지상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상형은‘꽃은 빛깔만 이야기하면 그 향기를 짐작하며, 내포가 넓고 함축이 많고 심리적·비약적 회화를 건낼 수 있으며, 연애적 모험성이 있는’그런 여인, 루날의 뿌랑슈급의 여인이었다 한다. 실제로 그의 주위에는 꽤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있었던 듯하다. 이경원과의 결혼 직후에도 묘령의 여인과 한방에 있는 것이 최정희에게 목격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진부 우체국장의 딸인 마이코는 평양으로 끊임없이 연서를 보냈고, 1941년 상처한 이후에도 그를 둘러싼 염분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쓰러졌을 때, 마지막을 지킨 이는 평양‘방가로’다방의 가수 마담인 왕수복 여인이었다.
효석은 사후 부친에 의해 평창군 진부의 논골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봉평의 고속도로변으로 이장되었다. 봉평터널에서 강릉 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장평 교차로의 서울 방면 버스 정류장에 묘지 입구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 그는 늘 저 멀리 이국의 고향을 꿈꾸었는지 모르나 오랜 문학적 여로에서 돌아와 영원히 몸을 묻은 곳은 고향 봉평이었던 셈이다.
이효석의 삶과 작품이 어떠했던 간에 이곳 봉평 주민들은 봉평이 이효석의 고향이라는 것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일례로 효석의 문학적 얼을 기리는 향토 모임인 봉석회(회장 박동락)가 만들어진 것이 이미 25,6년 전이다. 물레방아간을 복원하고 가산공원을 세우는 기념사업 등이 모두 민간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효석의 봉평을 사랑하고, 그곳이 그 어느 곳보다도 값진 문화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지길 소망하고 있다.
이효석의 호를 딴‘가산공원’이 조성된 것은 지난 1990년이라 한다. 국가에서도 이곳을 문화마을로 지정하여 주민들의 노력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듯, 필자가 찾은 날에도 대화리에서는 문화마을 조성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 이미 조성된 가산공원과 더불어 효석 문학의 산실인 평창 일대는 바야흐로 문화마을로 탈바꿈할 것이다.
문화란 시간의 퇴적물이다. 사람들이, 삶의 질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국민소득 만불 시대를 넘어선 것이 바로 작년이고 보면, 생가를 찾으면서 느꼈던 문화에 대한 우리 모두의 무관심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산공원이 세워진 것이 이제 햇수로 6년째, 사람으로 친다면 걸음마를 뗀 아이가 이제 학령에 접어들 나이인 것이다. 육체적·정신적 성장을 거듭할 아이의 미래처럼, 문화도 미래의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훨씬 희망적이지 않을까. 몇 년 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워져 있을 것을 기대하며 발길을 서울로 돌렸다.
(출처: http://www.arko.or.kr/zine/artspaper96_06/1996061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