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메밀꽃 필 무렵 - 이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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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85회 작성일 19-04-18 14:46본문
[중앙시평] 메밀꽃 필 무렵
[중앙일보] 입력 2012.09.03 00:11 수정 2013.05.08 17:51
9월은 메밀꽃 필 무렵. 해마다 이맘때면 강원도 평창의 봉평골은 겨울 눈꽃처럼 눈부시게 피어난 메밀꽃으로 온통 은백(銀白)의 세상이 된다. 아득히 펼쳐진 메밀꽃밭 사이로 들어서면 시리도록 흰 꽃잎들의 향연(饗宴)이 온몸을 이채로운 정감(情感)으로 휘감는다.
평창의 가을 들녘엔 이 고을 태생의 작가 이효석이 쓴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정겨운 장면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금방이라도 길가 주막에서 충주댁이 버선발로 뛰쳐나올 것만 같고, 성서방네 물방앗간에는 풋풋한 처녀의 수줍음이 아직도 진득 배어 있는 듯하다.
일제(日帝)의 암흑 시절,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28세에 숭실전문 영문학 교수가 된 이효석은 빈민계층의 슬픈 현실과 사회적 계급의 부조리에 분노하며 동반작가(同伴作家)로 문학세계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를 거쳐 진부면장을 지낸 지식인이었는데, 천재 소리를 듣던 아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지거나 또는 고등문관시험으로 출세의 길을 달리는 대신, 문학을 한답시고 서양풍에 물들어 커피 향과 프랑스 영화를 즐기는 모습이 내심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이효석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서 잠시 일한 적도 있었지만, 깊은 자책(自責)을 안고 곧바로 검열계를 떠난다. 그는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글을 썼다. 현실과 야합할 만큼 영악스럽지도, 그처럼 비양심적이지도 않았던 이효석은 암울한 민족 수난의 현실을 슬며시 벗어나 탐미적인 몽환(夢幻) 속으로 도피한다.
그 몽환은 시푸른 달빛을 머금은 메밀꽃이 강물처럼 출렁이는 산골 밤길의 서정(抒情)에서 황홀하게 펼쳐진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작가 김동리는 이효석에게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별명을 붙였다.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에 가깝다는 뜻일 게다.
물방앗간 처녀를 품에 안았던 옛 추억과 왼손잡이까지 쏙 빼닮은 아들 동이를 만난 오늘의 뒤엉킴, 여러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의 스산한 현실과 동이 어미를 찾아갈 꿈에 부푼 설렘…, 이런 엇갈림들이 지천으로 피어난 메밀꽃 속에 녹아 흐르면서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달이 기울면 새벽이 가깝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허생원의 귀에 청청하게 들려오는 나귀의 방울소리는 어제의 애잔함과 오늘의 아픔을 뒤로하고 내일의 꿈을 재촉하는 새벽종의 울림인 듯하다.
고단한 나귀의 등에 허생원과 자신의 삶을 한데 엮어 얹은 작가가 못내 그리워한 것은 도회지가 아니라 전원(田園)의 삶이었다. 도시생활의 멋을 즐기며 힘에 겨운 호사(豪奢)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이효석의 가슴에는 언제나 고향의 흙냄새가 눅눅히 흐르고 있었다. 아내와 갓난 아들이 잇따라 병사하자 실의에 빠진 그는 2년여 동안 만주 등지를 헤매던 끝에 뇌막염으로 36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이효석은 출세도 부귀도 못 누린 채 보헤미안처럼 방황하다가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의 고향 평창의 9월은 ‘메밀꽃 필 무렵’의 가슴 저미는 이야기로 해마다 활기를 띠곤 한다. 그가 만약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제의 관리가 됐더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일 아닌가.
적잖은 예술인들이 영특한 상업적 수완으로 짭짤하게 돈맛을 즐기고 있는 이즈음, 불우했던 소설가 한 사람이 먼 훗날의 고향산천에 어떤 충만(充滿)을 안겨주고 있는지를 되새겨보며 새삼 ‘문화의 힘’을 절감한다. 오늘날 평창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을 살림을 챙기던 면장 아버지가 아니라, 고향을 등지고 도회지를 방랑하던 소설가 아들이다.
여야의 대통령 후보들마다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책임지겠노라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국가경영을 이처럼 물질적 인프라의 면에서만 이해하는 태도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묵직한 인문정신, 두터운 문화의식이야말로 나라의 미래를 풍성하게 열어가는 가치와 품격의 리더십이 아닐까. 더욱이 제18대 대통령은 ‘문화 올림픽’을 꿈꾸는 2018년 겨울올림픽의 개회를 선언해야 하는 터에. 그것도 이효석의 고향 평창에서.
9월이 오면, 이효석의 예술혼 깃든 자연의 정취와 그 속에 켜켜이 박힌 우리네 삶의 슬픈 진실, 그 서럽고도 아름다운 애환(哀歡)의 속삭임들이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가을 벌판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휘몰아간다. 그 감동을 상업문화와 문화장사꾼들이 어찌 흉내나마 낼 수 있으랴.
-메밀꽃 향기 흩날리는 봉평골 들녘에서-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기사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9214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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