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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모던 미와 탈제도화된 인간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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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67회 작성일 20-12-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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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모던 미와 탈제도화된 인간의 본성
                        - 도피성문학에 대한 비판론 -
                                         
                                                    - 이 효 석 론                                       
                                                                              문 흥 술 (서울여자대학교) 
                                   
1.  머리말

  가산(可山) 이효석(1907~1942)은 경성제일고보 졸업 직전인 1925년에 시 「봄」을 《매일신보》(1925. 1. 18)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1942년 5월 25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7여 년 동안 수십 편의 단편소설과 2편의 장편소설을 비롯하여, 시, 수필, 희곡,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유진오, 채만식과 함께 동반자 작가로 알려진 그의 작품 세계는 1933년에 발표된「脈」을 전후로 하여 일반적으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동반자 작가로서의 측면을 드러내는 시기(1933년 이전)로,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도시와 유령」,「행진곡」, 「기우」,「노령근해」,「추억」,「상륙」,「약령기」,「북국사신」,「북국점경」등이 있다.
두 번째는 동반자 작가로서의 경향을 불식하고 새로운 작품 세계를 펼치는 시기(1933년 이후)이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은 다시 세 가지로 유형화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시골의 삶을 다루는 작품으로, 「돈」, 「수탉」, 「산」, 「분녀」, 「들」, 「고사리」, 「메밀꽃 필 무렵」, 「개살구」, 「영계」, 「山精」, 「사냥」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유형은 도시적 삶을 다루는 작품으로, 「마음의 의장」, 「일기」, 「수난」, 「聖樹賦」, 「계절」, 「천사와 산문시」, 「인간 산문」, 「성찬」, 「삽화」, 「장미 병들다」, 「막」, 「공상구락부」, 「해바라기」, 「가을과 산양」, 「여수」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유형은 이효석이 말년에 일본어로 발표한 작품들로, 상고주의적인 취미를 드러내는 「은은한 빛」, 「春衣裳」, 「소복과 청자 」, 「엉겅퀴의 장」등이 있디.
 
  이러한 이효석의 작품 세계에 대해 지금까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먼저 1930년대 한국 문단을 지배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양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이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는 이효석의 동반자적 경향을 논하면서, 그의 동반자적 경향은 당대 시대사조에 영합하기 위해 좌익 사상으로 자신을 분장했다(정명환, 「위장된 순응주의」) 고 보고 있다. 한편 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이효석의 소설을 도시소설의 일종으로 볼 수 있으나,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친목 단체라 할 수 있는 ‘구인회’의 참가가 그의 자의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그의 도시소설 역시 모더니즘 문학으로 보기에는 모호하다고 평가(서준섭,『한국모더니즘 문학 연구』)하고 있다.

  다음, 이효석 소설을 도시소설과 농촌소설로 유형화하려는 견해(전혜자, 「한국 근대문학에서의 도시와 농촌」이다. 곧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유혹과 사기, 타락과 방탕이 난무하는 퇴폐적인 소설이며, 농촌을 배경으로 전원의 이미지, 흙에 대한 집착, 자연과 인간의 일치를 보여주는 ‘문화적 원시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위의 접근 방법들은 모두 동반자적 경향과 탈동반자적 경향을 보이고, 도시의 삶과 농촌의 삶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 이효석의 작품 세계를 그 전체적인 면에서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두된 것이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토속성과 이국성이라는 양 측면에 주목하면서 그의 작품 창작의 원동력을 추적하는 방법이다.

  곧 이효석 소설에 나타나는 서구적 소재에 주목하여 그의 소설의 밑바탕에는 서구지향성에 입각한 동경과 이상이 강하게 노출되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에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정한모, 「효석 문학의 서구적 소재」)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이효석이 식민지 제국대학 영문과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서구지향성을 제국대학 영문과 출신으로서의 서양독서체험에 기초한 ‘관념으로서의 영문학’에서 비롯된 것(김윤식, 「병적 미의식의 양상」)이라 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효석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글쓰기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효석은 17여 년의 창작활동 기간 중, 1933년「脈」을 기점으로 초기의 동반자적 경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펼친다. 지금까지 기존연구는 그의 이러한 작품 세계의 변모를 표층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초기와 후기의 작품 세계로 양분하여 그 특질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표층에 드러나는 작품 세계의 변모를 두고 제1기, 제2기 식으로 구분하여 그 특질을 논하는 방법은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일관되게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효석이라는 작가는 두 명, 세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는 점은 작가론의 관점에서 늘 강조되어야 한다. 한 명의 작가가 시기에 따라 작품 세계의 특질을 달리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작품 세계의 변모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이다. 이른바 글쓰기의 원형(sub-text)을 밝히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곧 이효석으로 하여금 글쓰기를 하게 한 창작의 원형이 무엇이냐를 작품 세계 전체와 관련하여 재구성학, 이를 토대로 작품의 변화 과정과 특질을 추적함으로써, 작가 이효석의 작품세계의 전체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2. 마르크스주의에서 서구적 미의식의 세계로

  글쓰기의 원형이라는 관점에서 이효석의 작품에 접근할 때, 먼저 주목되는 것이 「약령기」, 「오리온과 능금」, 「성화」이다. 이들 작품들을 통해, 이효석 글쓰기의 원형이 무엇이며, 나아가 왜 그의 작품이 변모를 겪게 되고, 이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힐 수 있다.

 「弱齡記」(《삼천리》, 1930. 9)는 동반자 작가로서의 이효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학수가 애인 금옥의 자살과 학교 원정비 적립 반대 운동으로 고향을 떠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학수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하는 직접적 동인은 서울에서 좌익 운동을 하다가 쫓겨나 고향에 내려와 있는 ‘용걸’에 대한 동경으로 제시되어 있다. 좌익주의자인 용걸은 학수에게 ‘열정에 빛나는 그 눈’과 ‘깊고 광채 있고 믿음직한 눈’, ‘굳은 신념’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일종의 존경의 대상이다. 곧 학수는 용걸같은 좌익주의자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근본적인 동인은 다른 측면에 있다.

⒤ 학수는 두 번 세 번 거듭 여남은 번 이 시(인용자-하이네 시)를 읽었다.
읽을수록 알지 못할 위대한 흥이 솟아 나왔다. ‘아그네스’를 ‘금옥이’로 고쳤다가 다시 여러 가지 다른 것으로 고쳐 보았다. ‘동무’로 해보았다. 나중에는 ‘세상’으로 고쳐 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위대한 감격이 가슴속에 그득히 복받쳐 올라왔다.(p.43)

(ii) 보름달이 박덩이같이 희다. 벌판 끝에 바다가 그윽한 파도 소리와 함께 우련한 밤 속에 멀다. 윤곽이 선명한 초막의 그림자가 그 무슨 동물과도 같 이 시꺼멓게 능금밭 속까지 뻗쳐 있고, 그 속에 능금나무가 잎사귀와 꽃이 같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우뚝 솟아 있다. 달밤의 색채는 반드시 흰빛과 묵화 빛만이 아니다. 달빛과 밤빛이짜내는 미묘한 색채 - 자연은 이것을 그 현실의 색채 위에 쓰고 나타난다. 이것은 확실히 현실을 떠난 신비로운 치장이다. 그러나 달밤은 또한 이 신비로운 색채뿐이 아니다.
색채 외에 확실히 일종의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다. 알지 못할 그윽한 밤의 향기 - 이것이 있기 때문에 달밤은 더한층 아름다운 것이다. 인류가 태곳적 부터 가진 이 낡은 달밤 - 낡았다고 빛이 변하는 법 없이 마치 훌륭한 고전(古典)과 같이 언제든지 아름다운 달밤!(p.38)

⒤에서 학수가 ‘하이네 시집’을 탐독하고 있으며, 이 시집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심지어 재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ii)에서 ‘달밤’의 ‘알지 못할 그윽한 향기’가 ‘현실을 떠난 신비로운 치장’이며, ‘인류가 태곳적부터 가진’것으로 ‘마치 훌륭한 고전’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로부터 학수가 지향하는 세계가 ‘하이네’로 표상되는 서구 영문학적 지식과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특정 시대의 지식이라기보다 역사와 시간을 초월한 ‘훌륭한 고전’과 관련된 지식임을 알 수 있다. 곧 학수가 동경하는 세계는 ‘용걸’과 같은 좌익주의자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서구 영문학적 지식과 관련된 ‘신비로운’세계이자 현실초월적인 세계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기존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거니와, 작가 이효석은 제일고보 시절부터 체홉에 열중했고,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맨스필드, 입센, 토마스 만, 워어즈워드, 버언즈 등의 작가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여기서 이효석 소설에 나타나는 동반자적 경향과 관련하여,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향성이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통한 자본주의 현실변혁과 그 변혁을 위한 실천적 사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동반자적 경향’은 사회주의 혁명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그것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한 문학적 경향을 일컫는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이효석은 동반자 작가가 될 수 없다. 그는 마르크스 철학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실천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사회 변혁을 위한 ‘행동’과 ‘신념’을 배제한 채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받아들이고 곧 그것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사상적 밑바탕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서구 ‘고전’과 관련된 영문학적 지식에 대한 강한 지향성과 관련이 있다.
  이를 「오리온과 능금」(《삼천리》, 1932. 3)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마르크스 철학’과 ‘능금의 철학’이 대조되고 있으며, 이것은 ‘연구회’와 ‘나오미’의 대조로 구체화되고 있다.

⒤ 나오미의 하아얀 이빨이 웃음을 띄우며 능금 속에 빛났다.
“금욕은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이 아니에요. 솔직한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가 아닐까요?”
그러나 밝은 밤거리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능금을 버적버적 먹는 풍경은 프롤레타리아답다느니 보다는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모던 풍경이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나오미의 자태에는 프롤레타리아다운 점은 한 점도 없으 며, 미래에도 그가 얼마나한 정도의 프롤레타리아 투사가 될까도 자못 의문이었다. 너무도 아름답고 사치하고 모던한 나오미였다.
“능금 좋아하세요?”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모두 아담의 아들이요, 이브의 딸이니까요. 자, 그럼 한 개 잡수세요.”
나오미는 여전히 미소하면서 능금 한 개를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렇지요. 조상 때부터 좋아하던 능금과 우리는 인연을 끊을 수는 없어요.
능금은 누구나 좋아하던 것이고 또 영원히 좋은 것이겠지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높게 빛나는 능금이지요. 마치 저 하늘의 오리온과도 같이 빛나는 것이에요.”
“능금의 철학.”(pp.63-64)

(ii)“가지가지의 붉은 사랑을 맺어 가는 왓시릿사의 가슴속에는 물론 든든한 이지의 조종도 있었겠지만 보다도 뛰는 피와 감정에 순종함이 더 많았겠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저도 왓시릿사를 좋아하고 찬미할 수 있어요.”
“사업 제일, 연애 제이, 어디까지든지 이 신조를 굽히지 않고 나간 것이 용감하지 않소?”
“그러나 사업 제일이라는 것은 결국 왓시릿사에게는 한 개의 방패와 이유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의 사나이로부터 다른 사나이에게 옮아갈 때 거기에는 사업이라는 아름다운 표면의 간판보다도 먼저 일의적인 좋고 싫다는 감정의 시킴이 있을 것이 아닌가요? 결국 근본에 있어서는 감정 제일, 사업 제이일 것예요.”(p.69)
 
  위 인용문에서 ‘나오미’는 ‘능금’과 ‘오리온’에 비유되고 있다. 그긋은 ‘아담과 이브’의 능금이고, ‘코카사스의 결혼 풍속과 관련된 능금’이자, ‘오리온의 별자리’와 같은 것으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것이다. “진한 눈썹 밑에 열정을 그득히 담은 눈동자는 마치 동물과 같이 교교한 광채를 던지고 불빛에 물든 머리카락은 그 주위에 열정의 윤곽을 뚜렷이 발산”하는 나오미는 ‘나’에게 ‘동지라는 느낌보다도 여자라는 느낌’을 주는 존재로, ‘프롤레타리아답다느니 보다는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모던>한 풍경’이며, ‘성스럽고 신비로운 그림’과 같고, ‘아름답고 사치하고 모던’한 존재다. 이를 통해, ‘나오미’는 앞에서 살펴 본 ‘하이네’와 ‘훌륭한 고전’과 같은 서구 영문학적 지식에서 태동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연구회’와 관련된 ‘프롤레타리아’는 ‘속되고 평범한 지상적 풍경’에 불과한 것으로, ‘금욕’을 도덕으로 여기고, ‘사업이라는 아름다운 표면의 간판’을 강조하면서 ‘솔직한 감정 표현’을 억압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좋고 싫다는 감정의 시킴’을 중요시하면서 ‘왓시릿사’처럼 ‘든든한 이지의 조종’과 함께 ‘뛰는 피와 감정에 순종’하는 것을 중시한다.

  여기서 이효석이 마르크스 철학을 위선적이고 억압적이며 현실의 속된 것으로 치부하고, 서구 영문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서구적 ‘이지’와 ‘열정’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리온’과 ‘아담과 이브’로 표상되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능금’에서 느낄 수 있는 ‘차가움’과 ‘붉음’처럼, 서구적 이지에 기초한 ‘모던’하면서도 ‘아름답고 신비롭고 사치한’ 것이면서, 더불어 어떤 가식적인 제도적 틀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본능적 감정과 열정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성화」(《조선일보》1935. 10.11~31)에서 보다 심화되어 제시되고 있다.
이 작품은 ‘앙상한 일상의 바다’를 비판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상’을 강렬하게 지향하고 있다. 이 지향성은 ‘쌍안경 렌즈’와 ‘호프만의 성화’에 의해 촉발되고 있다.

⒤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갈매빛 거리는 앙상한 생활의 바다가 아니요, 아름다운 꿈의 세상이었다.(p.82)

(ii) 호프만의 그 성화(聖畵)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은연히 나의 마음을 끌게 되었다. 크브로의 청년에게 딴 세상을 가르치는 기독의 손길이 나에게 는 무한한 유혹이었다. 청년 대신에 나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워 보면 그 유혹은 한층 더하였다. 기독의 말을 이해치 못하고 무거운 번민을 품은 채 하염없이 가버린 청년과는 달라 나는 나 자신의 뜻으로 기독을 이해할 수 있 고 나 자신의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인생’을 느낄 수 있었다.(p.86)


  ⒤에서 ‘쌍안경 렌즈’를 통해 ‘앙상한 생활의 바다’를 ‘갈매빛’으로 채색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을 추상화하여 지식(관념)의 영역에서 ‘아름다운 꿈’의 세상을 지향하는 것에 해당한다. (ii)에서 ‘흐프만의 성화’를 통해 지금 이곳의 생활이 ‘부족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기독’이 가르치는 단 세상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쌍안경 렌즈’로 현실을 추상화하고 현실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꿈의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일상’과 ‘아름다운 꿈의 세상’은 ‘난야’와 ‘유례’라는 두 여성의 대비로 구체화된다.

  이 작품에서 ‘일상’은 ‘흙덩이 위에 선 현실의 풍경, 거리의 냄새, 사람의 냄새’에서 보듯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제목만 알고 내용은 펴보지 않은 야릇한 이야기”라는 구절에서 보듯, ‘나’의 일상에 대한 인식은 추상적이다. 그런 추상적인 인식에 의해 현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먼저, ‘난야’와 관계된 측면이다. ‘난야’는 ‘유물적, 감각적’이고, ‘욕심과 피부의 감각’만 있는 존재로, ‘나’와 ‘탕일한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룸펜이자 거리의 불량자인 ‘함손’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녀는 “용돈이 떨어지면 나에게서 졸라다가 모르는 곳에서 함손과 같이 낭비”를 한다. 그런 ‘난야’는 ‘나’에게 “향기를 잃은 고기덩이요 김빠진 한 잔의 술”이자, “사람이 아니라 물건일 뿐”이다. 다음, 좌익주의자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건수’와, “가난으로 인한 주림의 빛이 전신을 감싸고”있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건수의 아내 ‘유례’와 관계된 측면이다.   기득의 손길이 가르치는 세상이 나에게 있어서 유례들의 행동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기는 그들의 행동의 세상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그다지 먼 것이 아니고 종이 한 장의 벽이 놓였을 뿐이었다. 그만큼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는 있었으나 끝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생각이 편벽된 때 솟는 것이다. 인류가 쌓아 온 전 지식의 이해는 나에게서 온전히 용기를 뺏어 버렸다. 따라서 유례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요, 그들의 세상은 여전히 종이 한 장 건너편의 것이었다. 그런고로 유례는 나에게는 유물적 행동의 대상이 아니고 일종의 정신적 우상으로 비치었다. 유례를 데리고 행동의 세상을 떠나 더 높은 세상으로 들어감이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성화의 의미였다.
(pp.86-87)


  '인류가 쌓아온 전 지식의 이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시공을 초월한 ‘훌륭한 고전’, 혹은 ‘하이네 시집’처럼 서양의 영문학적 지식과 관련이 있다. 그런 지식에 기초할 때, 마르크스 철학은 “해골을 모아 짜놓은 비인 탑과도 같은 쓸모없는 철학”이자, 그 철학이 요구하는 ‘행동’은 ‘편벽’한 지식이며 ‘유물의 싸움’에 불과하다.
‘나’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와 그 주의가 요구하는 ‘행동’을 거부하고 ‘유례’와 함께 ‘아름다운 꿈의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꿈의 세상’은 ‘난야’와 대비되는 ‘근대적 이지의 덩어리와도 같은 유례’로 표상되는 세계이며, 이 세계는 두 가지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먼저, 일차적으로 ‘꿈의 세상’은 ‘불란서에서 오는 모오드의 잡지’로 대표되는 서양 잡지와 서적에서 촉발된 서구적 문화생활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 세계는 작품에서 ‘호텔’로 제시되어 있다.

⒤ “갖은 진미를 먹어야 할 것. 음악을 풍성히 들어야 할 것. 좋은 그림을 보아야 할 것. 영화를 적당히 감상해야 할 것. 몸을 충분히 휴양해야 할 것.”(p.90)

(ii) 탱고의 리듬이 마음을 달뜨게 간질렀다. 겨른 짝들은 물고기같이 미끄럽고 풍선같이 가볍고 바다 위에 뒤뚝거리는 요트의 무리다.(p.93)


  이른바 서양 상류 귀족층의 문화생활이 가능한 곳이 일차적으로 지향하는 ‘꿈의 세상’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보듯, 열악한 현실에서 거의 실현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호텔’은 ‘산 속’으로 대체된다.

  "가방 속에 가득 든 지전을 가지고 항구의 호텔 한 간 방에 있는 신세 …… 이것이 현대인의 최대의 원이라고 하나 그것이 꿈만큼 생각될 젠 확실히 나는 생활할 힘을 잃은 것 같소. 아무것도 다 집어치우고 산속에 널집이나 한 간 짓고 가락나무와 백양나무를 심고 그 속에서 염소나 한 마리 길러 보았으면 하는 소극적 원이 있을 뿐이오.”(p.95)

  ‘산속’은 현실의 구체적 생활이 배제된 곳으로, 관념적인 자연에 해당된다. 그곳은 ‘오존 냄새’, 곧 ‘사람 냄새’와 ‘거리 냄새’가 배제된 ‘산이나 바다 냄새’로 표상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등대’로 압축된다. ‘등대’는 ‘통속소설의 세상과는 다른 아름다운 시’가 있는 곳이다.

  먼지와 해어 냄새의 항구를 지나 고개를 넘은 높은 산기슭에 등대가 있다. 파란 산, 푸른 바다의 짙은 배경 속에 뜬 하아얀 집들은 호수 위에 뿌려진 조개껍질이다. 일면으로 깔린 조약돌, 우윳빛 뺑끼, 조촐한 화단—모두가 종이 위에 채색된 수채화의 인상이지 흙덩이 위에 선 현실의 풍경은 아니다. 바다로 깎아내린 산등에 솟은 등대는 꿈속의 탑. 속세를 떠난 그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는 사람의 거동조차 유장하고 넉넉하다.(p.113)

  현실과 완전 절연된 ‘등대’야말로 ‘호프만의 성화’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길’이자 ‘천당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죄니 양심’이니 따위가 필요치 않는 곳으로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인간적’인 곳이다. 곧 ‘등대’의 세계는 현실을 벗어난 세계로, ‘종이 위에 채색된 수채화의 인상’처럼 모던한 세련미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세계이다. 그러면서 그 세계는 제도적 틀을 벗어나 인간의 본능적인 열정에 의한 합일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 탈제도, 탈현실, 탈생활의 공간으로서 서구적인 모던 미와 인간의 본능적 열정을 지닌 세계에서야말로 ‘근대적 이지의 덩어리’인 유례와의 합일이 가능하다.


3. 관념으로서의 자연과 프리미티브한 인간의 본성

  서구적 지식에 기초한 ‘모던’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지닌 세계, 그리고 탈제도화된 인간의 본능적 열정이 가능한 세계에 대한 지향성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지향, (ii)모든 사회 제도적 관습에 대한 거부로서의 남녀의 자유로운 몸의 사랑 추구 (iii)문명이전의 프리미티브한 순수 인간과 동물의 친화적 세계에 대한 지향, 보다 구체적으로는 동물의 성과 인간의 성의 결합으로 연결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장미 병들다」와 「들」이다.
  「장미 병들다」(《삼천리문학》, 1938. 1)는 서구적 지식에 기초한 모던한 미의 추구가 일상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관념으로서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지방 소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하는 남죽은 학생 시절 “아름다운 꿈을 함빡 머금은 흐뭇한 꽃”으로, 책점 대중원에서 진보서적을 읽고 좌익주의자가 되어 퇴학당한 후 영화배우와 성악가의 꿈을 키우지만 ‘시대의 파도’에 그 꿈이 좌절된다. 그 후 지방극단 ‘문화좌’에서 공연하는 현보의 창작극 ‘헐어진 무대’와 ‘오네일’의 번역극 ‘고래’의 공연 배우가 되지만, 공연이 상연 금지되면서 고향에 내려갈 여비를 마련하려 몸 파는 여자로 전락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남죽’(장미)으로 표상되는 서구적 모던 미의 추구가 열악한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남죽의 타락(장미 병들다)’로 함축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서구적 미는 탈생활, 탈현실의 아름다운 자연 공간에서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남죽이 가고자 하는 고향이자 그녀의 언니 세죽이 있는 고향에 대한 묘사에 잘 제시되어 있다.

  “얼음 속에 갇혀 있으면 추억조차 흐려지나 봐요. 벌써 머언 옛일 같어요…… 지금은 유월, 라일락이 뜰 앞에 한창이고 담 위 장미는 벌써 봉오리 가 앉었을걸요.”  이것은 남죽이 늘 즐겨서 외는 「고래」속의 한 구절이었으나 남죽의 대사는 이것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물 위에 둥둥 떠서 멀리 사라지는 찢어진 편지 조각을 바라보며 남죽의 고향을 그리는 정은 줄기줄기 면면하였다.

  “솔골서 시작해서 바다 있는 쪽으로 평야를 꿰뚫는 흰 방축이 바로 마을 앞을 높게 내닫고 있어요. 방축이라니 그렇게 긴 방축이 어디 있겠어요. 포플러나무가 모여 서고 국제 열차가 갈리는 정거장 근처를 지나 바다까지 근 십 리 장간을 일직선으로 뻗쳤는데 인도교와 철교 사이를 거닐기에두 이십 분이나 걸려요. 물 한 방울 없는 모래 개천을 끼고 내달은 넓은 둑은 희고 곧고 깨끗해서 마치 푸른 풀밭에 백묵으로 무한대의 일직선을 그은 것두 같 수. 둑 양편으로 잔디가 깔린 속에 쑥이 나고 패랭이꽃이 피어서 저녁 해가 짜링짜링 쪼이면 메뚜기와 찌르레기가 처량하게 울지요.

  풀밭에는 소가 누운 위로 이름 모를 새가 풀 위를 스치면서 얕게 날고 마을로 향한 쪽에는 조, 수수, 옥수수밭이 연하여서 일하는 처녀 아이가 두어 사람씩은 보이죠. 여름 한철이면 조카아이와 같이 염소를 끌고 그 둑 위를 거닐면서 세월없이 풀을 먹여요. 항구를 떠난 국제 열차가 산모퉁이를 돌아 기적소리가 길게 벌판을 울려 올 때, 풀 먹던 염소는 문득 뿔을 세우고 수염을 드리우고 에헤헤헤헤헤 하고 새침하게 한바탕 울어 대군 해요. 마을 앞의 그 둑을—고향의 그 벌판을—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그리운지 모르겠어요.”
  남죽의 장황한 고향의 묘사는 무대 위에서와는 또 다르게 고요한 강물 위를 자유롭게 흘러내렸다. 놀잇배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의 음악이 속된 유행가가 아니고 만약 교향악의 반주였던들 남죽의 대사는 마디마디 아름다운 전원교향악으로 들렸을 것이다.(pp.268-269)


  남죽이 지향하는 고향은 현실의 구체적 생활이 있는 고향이 아니라 상상(관념)의 고향이다. 그것은 ‘오네일’의 연극 ‘고래’와 전원교향악에서 촉발된 것으로, 탈사회와 탈생활의 공간이자, 서구 영문학적 지식에 기초한 모던한 미의식으로서의 자연 공간이다. 곧 서구적 미의 세계는 열악한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아름답고 모던한 순수관념으로서의 자연에서 가능함을 이 작품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추상적인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고 모든 제도적 틀로부터 벗어나 동물적 본성과 어우러진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 「들」(《신동아》,1936. 3)이다. 이 작품에서는 ‘들’과 ‘흙’이 대조되고 있다. ‘흙’은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면서 생활하고 있는 ‘마을’을 의미하며, 그곳은 ‘문수’가 끌려가는 ‘공포’의 공간이다. 반면 ‘들’은 그런 현실적 생활이 완전히 배제된 ‘거룩하고 아름다우면서 호젓한 멋’을 지닌 미적 대상이다.

  작가는 서양 영문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서구적이고 모던한 미, 아름답고 거룩하고 성스럽고 신비로운 미를 지향한다. 그런 미가 한국적 현실에는 없다.
그래서 작가는 한국적 현실에서 생활을 탈각시키고, 서구적 미의 세계를 담지하는 대상에만 주목하여 그 대상에 자신의 관념적 미의식을 투사시킨다. 그것이 ‘들’이다. 그래서 이효석이 주목하는 ‘들’은 구체적인 현실의 ‘생활 찌꺼기’가 녹아있는 ‘들’이 아니라, 아름다운 미적 대상으로서 추상화된 ‘들’이다. 그래서 그 ‘들’은 ‘마술과도 같은 자연의 매력’이 있고, ‘어린아이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과 같으며, ‘옷 벗는 여인의 나체’와도 같은 곳이다. 곧 그곳은 현실과 생활과 제도적 틀이 거세되고 서구적 미의식으로 추상화된 관념으로서의 순수 자연에 해당한다.

  서구적 미에 대한 지향이 추상화된 순수 관념으로서의 자연으로 전이되는 이 지점을 통해 작가 이효석의 미의식이 이국적 호기심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서구적 미(지식)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어떤 깊이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단순히 새롭고 이국적인 것에 대한 다소 경박한 호기심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꽃다지, 길경이, 나생이, 딸장이, 먼둘네,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초, 씀바구, 돌나물, 비름, 능쟁이.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P.174)


  위에 열거된 꽃들은 한국의 토속적인 ‘생활’에 뿌리내리고 있는 꽃들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서구적 지식의 영역에서 접한 새롭고 이국적인 정취를 지닌 추상화된 한국꽃에 불과하다. 곧 이들 꽃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생활적인 것이 배제되고 이국적인 미적 정취를 드러낼 수 있는 ‘이름’으로서의 꽃에 대한 관심에 불과하다. 그것은 살아있는 꽃이 아니라 이국적으로 장식된 조화에 불과하다.

 “산촌적인 정서가 그대로 시골스런 표현에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작가의 심미성의 지원”(정한모) 때문이라는 평가는, 이효석에게서 한국의 토속적 소재가 서구적 미의식으로 추상화되면서 이국적 취미를 드러내는 기표로 세련화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서구적, 이국적 호기심에 의한 토속적인 것의 세련화의 자리에 토속적인 꽃 ‘이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관심이 세련된 한국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는 이효석 작품의 문체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자리야말고 이효석의 작가적 미의식과 그 표현의 세련성이 고급스럽게 결합되는 자리이며, 그것은 현실생활에 바탕을 둔 산문의 세계가 아니라 탈현실의 꿈과 이상을 다루는 시적 서정의 세계에 해당한다.

  사람의 지혜란 결국 신비의 테두리를 뱅뱅 돌 뿐이요, 조화의 속의 속은 언제까지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일 듯싶다. 초록 풀에 덮인 땅 속의 뜻은 초록 옷을 입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엿볼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이다. 얀들얀들 나부끼는 초목의 양자는 부드럽게 솟는 음악. 줄기는 굵고 잎은 연한 멜로디의 마디마디이다. 부피 있는 대궁은 나팔 소리요, 가는 가지는 거문고의 음률이라고도 할까.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그것이 봄의 걸음이다.
  풀 위에 누워 있으면  은근한 음악의 율동에 끌려 마음이 너볏너볏 나부낀다. 꽃다지, 질경이, 민들레…… 가지가지 풋나물을 뜯어 먹으면 몸이 초록으로 물들 것 같다. 물들어야 될 것 같다. 물들어야 옳을 것 같다. 물들지 않음이 거짓말이다. 물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새가 지저귄다. 꾀꼬리일까.
  지평선이 아롱거린다.
  들은 내 세상이다.(pp.174-175)

  생활과는 동떨어진 ‘저 건너 세상’인 ‘초록 들’의 모든 것들은 구체적 현실의 대상이 아니라, 서구적 지식과 관련된 이국적인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표상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 표상물은 ‘음악’, ‘멜로디’, ‘나팔소리’, ‘거문고의 음률’, ‘알레그로’, ‘안단테’ 등과 같이 새롭고 세련된 한국어와 결합되어 이국적 정취를 한껏 풍기면서, 아름다운 시적 서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 등장하는 ‘들’은 생활이 배제된 채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설정된 것에 불구하다. 이처럼 탈생활, 탈제도, 탈사회적 공간이다, 이국적이고 서구적인 모던미를 간직한 ‘들’에서 인간은 모든 제도적 가식을 벗어버리고 동물처럼 ‘프리미티브(primitive)’한 인간이 되어 그 본능적 욕구를 자유롭게 분출한다.

개울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겁내지 않고 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꺼리는 법 없이 자웅은 터놓고 마음의 자유를 표현할 뿐이다. 부끄러운 것은 도리어 이쪽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중없이 오랫동안 그 요절할 광경을 바라보기가 몹시도 겸연쩍었다. 확실히 시절의 탓이다. 가령 추운 겨울 벌판에서 나는 그런 장난을 목격한 일이 없다. 역시 들이 푸를 때 새가 늦은 알을 깔때도 자웅도 농탕치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성내서는 비웃어서는 안 되었다. (pp.179-180)

  제도적 금기의 틀을 벗어버릴 때, 인간은 그 본능을 억압하는 모든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 그것은 탈현실과 탈생활의 공간에서 가능하다. 그 공간에서 인간은 ‘프리미티브’한 인간이 되어 동물처럼 자유로운 본성을 분출할 수 있다.
그 분출이 동물의 성과 결합되는 자리에 위의 대목이 놓여 있다. ‘나’와 ‘옥분’의 자유로운 몸의 사랑이 동물의 성과 결합되는 자리야말로 가장 탈사회적이고 탈문명적이고 탈제도적인 것에 해당한다.


4. 세 가지 작품 유형과 「메밀꽃 필 무렵」의 의미

  지금까지 이효석의 글쓰기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효석의 글쓰기의 원형으로 먼저 ⒤ 서구적 지식에 기초한 모던한 세련미에 대한 추구와 (ii) 인간의 본능적 열정의 자유로운 분출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지향 (iii)으로 연결되며, (ii)는 모든 사회제도적 관습에 대한 거부로서의 남녀의 자유로운 몸의 사랑 추구(iv)와 문명 이전의 프리미티브한 순수 인간과 동물의 친화적 세계에 대한 지향, 보다 구체적으로는 동물의 성과 인간의 성의 결합(v)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생활의 찌꺼기’와는 무관한, 탈생활, 탈현실, 탈제도, 탈문명적인 것이면서, 작가의 이국적 호기심과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효석의 작품 전개 과정에서 이러한 원형적 특질들은 뒤섞여 제시되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이효석의 다양한 작품 세계가 전개된다. 이를 원형적 특질 중 어느 측면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 ‘행동’을 배제한 채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드러내거나, 마르크스 철학을 비판하고 서구 영문학적 지식의 세계를 지향하는 소설, (ii)세련된 여인이나 순수 자연을 통해 서구의 모던한 미의 세계를 지향하는 소설, (iii)기존의 제도적 관습을 비판하고 탈제도화된 순수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는 소설로 유형화될 수 있다.

  돼지의 교접 장면을 통해 동물의 성과 인간의 본능적 성을 일체화시키고 있는 「돈」, 성관계를 통해 몸의 변화를 다루면서 인간의 본능을 문제 삼는 「분녀」,  인간의 본능적 욕정을 구속하는 ‘살구나무집’을 배경으로 하는 「개살구」, 근대적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제도 밑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문제 삼는 「성찬」은 모두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사회제도적 측면을 비판하고 탈제도화된 인간의 본능적 열망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메밀꽃 필 무렵」(《조광》, 1936. 10)은 이효석의 글쓰기의 원형이 총체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다음 네 가지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작품의 배경이 되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과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의 특성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pp.203-204)

    '부드러운 달빛’, ‘소금을 뿌린 듯한 하얀 모밀밭’등으로 이루어진 자연은 구체적이고 현실적 생활이 배제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앞서 보았듯이, 서구적 모던 미를 지닌 기표로서의 추상적인 자연이다. 이러한 탈생활과 탈사회, 탈제도의 공간에 위치한 주인공 허생원 역시 현실적인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웠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더구나 그것이 저녁 녘이어서 등불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pp.202)

  생활인의 입장에 설 때 장돌뱅이의 삶은 고달프고 신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생원은 그가 소속된 인간사회도, 가족도 없이 홀홀 단신 철저하게 외톨이로 떠돌아다닌다. 곧 그는 사회와 현실과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장돌뱅이로 떠돌아다니는 여정에서 만나는 자연을 ‘아름다운 강산’이자 ‘그리운 고향’으로 여기고, 그 자연을 대하면서 ‘가슴이 뛰노’는 것은 그가 생활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처럼 이 작품은 배경과 인물의 측면에서 탈생활, 탈현실의 측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이효석의 글쓰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서구적인 모던 미와 이국적인 것에 대한 지향성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참한 현실이나 떠돌이 장돌뱅이의 삶의 애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련된 미적 정취를 지닌 자연과 그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하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이국적 정취이다.

  둘째, 허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와의 관계이다. 허생원이 젊은 시절 경험한,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인 성 서방네 처녀와의 물방앗간에서의 관계는 역시나 생활과 관련된 필연성에 의해 연결되지 않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두 사람의 관계 맺음은 ‘보이는 곳마다 하얀꽃이 핀 모밀밭’과 ‘너무나 밝은 달밤’이 어우러진 탈현실적인 요소에서 비롯된다. 곧 탈현실적이고 탈제도적인 공간인 ‘물방앗간’에서 인간의 순수한 본성에 의한 육체적인 관계와 사랑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 서방네 처녀가 처음 만난 사내에게, 그것도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장돌뱅이인 허생원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탈제도화된 공간과 인간의 순수한 본성에 기인한다.

  셋째, 허 생원과 나귀의 일체성이다. 이것은 탈생활과 탈제도의 공간으로서의 순수 자연과 그 자연에서 모든 제도적 틀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되찾은 ‘프리미티브’한 인간과 동물의 공통성에 연유한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 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까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쓸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 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pp.200)

  암놈을 보고 발정을 하는 늙은 나귀는 충주집을 보고 젊은 동이를 질투하는 늙은 허생원과 동일하다. 이처럼 동물의 성본능과 인간의 성본능을 동일시함으로써, 탈제도화된 인간과 동물의 공통성을 그려내고 있다.

  넷째, 이 작품은 김윤식의 지적처럼 시간과 공간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봉평에서 대화로 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하는 거리이다. 이 거리에서 작품은 개울물을 건너는 것에서 끝이 나며, 이에 따라 시간도 정확하게 대응되는데, 그것이 작품 처음 부분에 제시된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다. 80리 산길 중 60리를 간 거리, 그 거리에 대응하는 시간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며, 이 부분이 견고하게 뒷받침하고 있기에 이효석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빛이 나는 것이다. 
               
  이효석의 소설을 두고 흔히 ‘시대 도피의 문학’ 혹은 ‘이 땅과 무관한 이방인’의 작품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곧 그의 작품은 일제강점기의 사회 현실과 유리된 서양적 풍물, 토속, 자연, 성에 치중함으로써 서구 취미 내지 이국 취미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현실 생활과 밀착된 산문의 세계보다, 탈현실의 꿈과 이상세계에 대한 이국적인 호기심을 다루는 시적 서정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이효석 작품이 자유롭지 못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이효석의 작품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폄하하는 것으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왜 이효석이 이러한 작품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지에 대해, 당대의 사회 역사적 측면과 관련하여 작가의 정신사적 구조를 해명하는 작업이 보다 정밀하게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심미성과 세련된 표현이 한국소설사 전체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가를 밝히는 작업이 병행될 때, 그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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